<고찰 : 구석기시대 유물분석>
공장신축부지 내 유적에서 구석기시대 문화층이 드러난 지점은 구릉 말단부에 해당한다. 완만한 비탈을 이루는 지형이었으나 경작지로 이용되면서 대체로 평평하게 조성되었다. 밭작물을 경작하는 과정에서 문화층의 상부가 흐트러져 지표에서는 소량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문화층(갈색 찰흙층)에서 유물이 분포하는 평면 범위는 약 10×25m이며, 현 범위에서 보다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문화층이 이어지면서 확장된다. 단면상의 유물 분포는 대체로 일정한 두께를 유지하며 출토되고 있다. 특히 유물이 집중되는 칸은 해발 44.6~45.1m에서 출토되는데 가장 집중되는 부분은 약 40~50㎝ 내에서 출토되어 문화층의 두께는 50㎝ 이내이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125점이다. 이 중 표본조사에서 19점의 유물이, 발굴조사에서 106점의 유물이 나왔다.
1. 유물 조성으로 본 유적의 성격
표본조사 및 발굴조사에서 나온 125점의 전체 유물 조성을 살펴보면 부스러기가 46점(37%)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조각과 격지가 각각 30점(24%)과 19점(15%) 나왔다. 몸돌은 단 1점 나왔으며, 석재로 볼 수 있는 자갈돌도 3점 확인되었다. 손질된 도구 종류로는 주먹도끼(1점), 대형밀개(2점), 밀개(6점), 뚜르개(4점), 긁개(2점), 부리날석기(3점), (잔)손질있는조각(4점), 사용흔있는조각(1점) 등이 나왔다. 그 외에 망치돌도 3점 확인되었다. 석기제작에 이용된 암석은 석영맥암과 규암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도면 37). 석영맥암은 83점으로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그다음으로 규암은 31점 나와 25%를 차지한다. 그 외에는 편암, 편마암, 사암 등은 각각 8점, 2점, 1점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전체를 대분류하면 크게 석기제작과정의 산물류 96점, 도구 류 23점, 석기제작용 공구류 3점, 원석류 3점 등으로 구분된다. 바꿔 말하면 석기제작의 재료가 되는 석재(원석류), 석기제작용 공구류 및 제작과정에서 나온 산물류를 포함하여 석기제작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유물이 모두 102점으로 전체의 82% 정도이다. 다만, 부스러기를 비롯한 격지와 조각의 비율이 높은 데 반해 몸돌은 1점만 출토되었고, 게다가 규암제 몸돌에 접합되는 격지나 조각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전체 유적의 범위 중 극히 일부분에만 제한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의 유물분포도에서 확인되듯이 이번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점의 보다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문화층이 이어지면서 확장되는 점, 이번 조사지점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구석기시대 유적 발굴조사 사례가 있는 점등으로 뒷받침된다. 이러한 요소를 종합해 볼 때 유적은 현재 드러난 문화층 범위보다 더 큰 규모의 석기제작터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전체 유적의 극히 일부분만 발굴된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석기 사용의 행위를 유추할 수 있는 도구류는 23점으로 18%를 차지한다. 현재 발굴조사된 범위로 볼 때 소규모유적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소규모유적에서의 도구류 출토 비율이 대체로 10% 내외임을 생각할 때 높은 편이다. 나아가 23점의 도구 중 밀개와 뚜르개, 부리날석기 등 특정 용도로 연결시킬 수 있는 유물이 13점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곧 밀개, 뚜르개, 부리날석기 등을 사용하는 작업의 빈도가 높았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발굴조사된 범위는 전체 유적의 문화층 중 극히 일부분만 발굴되었음을 고려할 때, 유적의 명확한 성격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현재까지의 조사성과로 볼 때 규모가 있는 석기제작터의 일부가 드러났고, 아울러 밀개와 뚜르개, 부리날석기 등의 특정 석기를 보다 중점적으로 사용했던 지점이 발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곧 석기 제작의 모습과 석기 사용의 모습을 모두 엿볼 수 있는 생활터로써의 성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 문화층의 시기
표준 단면으로 본 지층 퇴적은 크게 4개로 구분된다. 위로부터 1. 표토층(20~30㎝)-2. 갈색 찰흙층(Hue 7.5YR 4/6, 50~60㎝, 문화층)-3. 황갈색 모래질찰흙층(Hue 10YR 5/6, 50~80㎝)-4. 황갈색 모래층(Hue 10YR 5/6, 약 1m 이상, 하성퇴적) 순으로 퇴적되었다. 이 중 표토층 아래의 갈색 찰흙층이 구석기시대 문화층으로, 표본 및 발굴조사에서 모두 125점의 석기가 나왔다. 뗀석기가 출토된 지층은 갈색 찰흙층 내지 적갈색 찰흙층으로, 토양쐐기 구조의 끝부분이 부분적으로 확인되는 층의 상부이다. 이를 주변의 발굴조사된 유적과 대비해 보면, 화성 감배산유적(경기대학교박물관 2006)의 2문화층, 그리고 화성 오산리유적(中央文化財硏究院 2015)의 2 혹은 1문화층, 화성 청계리유적(中央文化財硏究院 2015)의 3 혹은 2문화층 등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층 내 상부 토양쐐기 구조의 아랫부분이 극히 부분적으로만 발달해 있는 특징으로 볼 때, 한창균의 B1층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한창균 2003). 다만 표토 및 경작층을 걷어낸 후 드러난 문화층의 토양쐐기 구조는 시작 부분이 이미 깎여나간 상태였으므로 적어도 B1층의 상부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보다 아래는 한창균의 B2층에 상당한다. 화성 감배산유적 2문화층은 30,000~35,000BP로 추정되었다. 화성 오산리유적의 경우, 1문화층에서 얻은 OSL 연대는 20±2Ka, 2문화층에서의 연대는 23±3Ka이다. 이 중 1문화층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반면 2문화층의 연대는 보다 아래에서 측정된 연대값의 차이 및 유물의 특징을 감안할 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있으며, 청계리유적의 연대측정 결과가 보다 참고할 만하다고 재고하였다. 화성 청계리유적의 OSL 연대는 2문화층에서 41±7Ka, 3문화층에서 38±9Ka이 보고되었다. 3문화층에서는 층의 최하부에서 석기가 출토되는 점을 들어 연대측정치보다 조금 이른 약 45Ka 전후로 해석하였다. 이번 조사지점에서 채취한 OSL 시료의 측정 결과는 32,380 ± 3,410 BC (1σ SE)로 절대연대편년 되었다. 따라서 문화층의 연대측정값 및 주변 유적의 연대값을 종합했을 때 30,000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에 일정 기간 머물렀던 구석기시대인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3. 도구류 비율로 본 공간의 성격
문화층에서 출토된 도구류는 23점이며, 종류는 주먹도끼(1점), 대형밀개(2점), 밀개(6점), 뚜르개(4점), 긁개(2점), 부리날석기(3점), (잔)손질있는조각(4점), 사용흔있는조각(1점) 등이다. 이들 도구류의 분포를 살펴보면 석기 종류별로 특정한 구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석기 제작과 석기 사용의 모습을 함께 그려보며 넓게 이해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도구별 크기를 비교해보면 대형밀개 2점은 약 10㎝ 이상으로 월등히 크다. 소형석기류 중 밀개, 뚜르개, 부리날석기, 긁개 등이 3~8㎝ 정도의 중소형에 수렴되는 반면, 손질 및 사용흔있는조각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크기에 분포함을 볼 수 있다.
도구류의 종류별 개수를 보면 대형밀개를 비롯한 밀개와 뚜르개, 부리날석기 등 특정의 용도로 연결시킬 수 있는 유물이 15점으로 전체 도구의 65%에 해당한다. 주변의 화성 오산리·청계리유적(中央文化財硏究院 2015)에서 이루어진 석기 쓴자국 분석을 참고할 때, 오산리유적의 밀개에서는 단단한 동물 재료에 사용되면서 형성된 흔적이 많고, 청계리유적에서는 부드러운 동물 재료에 사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분석 사례(김포 풍곡리유적, 호평 지새울Ⅱ유적, 남양주 호평동유적 등)를 참고할 때, 일반으로 밀개에서는 가죽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흔적들이 다수를 차지한다(提隆 2011, 김경진 2018). 이 일반적인 분석 결과를 적용할 때, 대형밀개와 밀개는 가죽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문화층에서 대형밀개와 밀개가 8점이나 출토되어 가죽 처리와 관련된 작업의 비 중이 높았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뚜르개와 부리날석기가 7점이나 출토된 점도 이와 연관시킬 수 있다.
특히 밀개의 경우, 날의 곡률에 따라 3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먼저 대형밀개의 날은 각각 3.3R과 4.3R로 둥근 정도가 가장 크다. 다음 표본조사에서 찾은 3점의 밀개와 발굴조사에서 나온 1점의 밀개는 2.1~2.4R로 중형 날로 볼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찾은 나머지 2점 밀개의 곡률은 각각 1.3R과 1.8R이고, 망치로 사용되기 전 밀개로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것의 곡률은 1.8R이다. 이 3점의 밀개 날은 소형 날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날의 곡률을 중심으로 비교했을 때 대-중-소형의 3개 그룹의 날이 갖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밀개를 사용한 가죽 처리 및 가공과 관련한 일련의 작업이 이루어졌으리라 추정된다.
4. 격지의 속성으로 본 도구 제작 기법
문화층에서는 1점의 규암제 몸돌이 출토되었다. 이 몸돌에는 아랫면과 앞면 등 2개의 격지면이 남아있으며, 각 격지면에 남아있는 격지 뗀 자국의 길이는 각각 4.9~8.9㎝와 5.0~7.6㎝이다. 종합하면 약 5~9㎝의 격지 떨어진 자국이 몸돌에 남아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몸돌에서 5~9㎝ 크기의 격지를 뗐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격지는 모두 19점이 나왔으며, 표본조사에서 1점, 발굴조사에서 18점이 출토되었다. 암석은 석영맥암과 규암이 각각 9점과 10점 확인되었다. 격지의 크기를 살펴보면 길이 2.2~4.5㎝, 너비 1.5~5.3㎝, 두께 0.8~1.9㎝에 분포하여 대체로 작은 편이다. 몸돌에는 5~9㎝의 격지가 떨어진 데 반해, 출토된 격지의 크기는 그 절반 정도의 크기인 셈이다. 격지 위끝의 형태는 떼기가 이루어진 것이 7점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곧은 것이 6점이다. 꺾인 것과 깨지거나 부러진 것이 각각 2점이며, 배면쪽으로 휜 것도 2점 있다. 특히 위끝에 떼기가 이루어진 것이 많아 특징적이며, 이런 경우 격지 위끝부에서 재차 격지를 뗀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격지 굽 상태를 보면 점굽(4점)과 선굽(2점)이 6점으로 비율이 높은 편이다. 점굽 및 선굽의 격지는 물론 몸돌에서 떼낸 예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격지 혹은 조각에서 재차 격지를 뗐을 때 나타나는 사례도 있다. 이처럼 점굽과 선굽의 빈도가 높은 점을 격지가 유난히 작다는 크기 분석의 결과와 연결시켜 볼 때 후자의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격지 등면 상태를 관찰했더니 격지의 배면인 예도 있어, 격지에서 재차 격지를 뗐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몸돌에 남아있는 격지 뗀 자국에 비해 실제 출토된 격지의 길이가 훨씬 작은 점, 격지의 굽이 점굽 혹은 선굽의 빈도가 높은 점, 격지 위끝 형태에 떼기가 이루어진 것이 7점이나 확인되는 점 등을 종합하면, 석기제작터에서 원래의 격지를 몸체로 하여 한 번 더 뗐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격지에서 다시 더 작은 격지를 떼는 경우가 빈번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도구류 중에는 격지의 위끝 부분에서 재차 격지를 떼어 날을 제작한 뚜르개(41번)가 1점 확인되었다. 또한 격지의 위끝 부분에서 다시 격지를 뗀 7점 중에는 뚜르개를 제작하던 과정으로 추정되는 것(101번)도 1점 확인되었다. 2016년에 발굴되었던 주변 유적 출토의 긁개에서도 이와 같은 특성이 확인되었고, 이를 ‘2차 가공석기’로 표현하였다(서해문화재연구원 2016).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격지의 위끝 부분에서 재차 격지를 뗀 나머지 6점도 뚜르개 혹은 어떤 특정 석기를 제작하는 과정 중에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양상을 종합하면, 격지의 위끝 가장자리에서 재차 작은 격지를 떼어 도구로 손질하는 기법은 이 유적에서 소형의 도구를 제작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체 유적의 문화층 중 극히 일부분만 발굴된 점, 동일한 기법으로 제작된 도구의 출토 및 확인율이 아직 낮은 점 등에서 특정 기법으로 복원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된다. 추후 발굴조사의 기회를 얻어 더 많은 관련 자료가 확보되어 도구 제작의 특정 기법으로 복원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고찰 : 구석기시대 유물분석>
공장신축부지 내 유적에서 구석기시대 문화층이 드러난 지점은 구릉 말단부에 해당한다. 완만한 비탈을 이루는 지형이었으나 경작지로 이용되면서 대체로 평평하게 조성되었다. 밭작물을 경작하는 과정에서 문화층의 상부가 흐트러져 지표에서는 소량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문화층(갈색 찰흙층)에서 유물이 분포하는 평면 범위는 약 10×25m이며, 현 범위에서 보다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문화층이 이어지면서 확장된다. 단면상의 유물 분포는 대체로 일정한 두께를 유지하며 출토되고 있다. 특히 유물이 집중되는 칸은 해발 44.6~45.1m에서 출토되는데 가장 집중되는 부분은 약 40~50㎝ 내에서 출토되어 문화층의 두께는 50㎝ 이내이다. 출토된 유물은 모두 125점이다. 이 중 표본조사에서 19점의 유물이, 발굴조사에서 106점의 유물이 나왔다.
1. 유물 조성으로 본 유적의 성격
표본조사 및 발굴조사에서 나온 125점의 전체 유물 조성을 살펴보면 부스러기가 46점(37%)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조각과 격지가 각각 30점(24%)과 19점(15%) 나왔다. 몸돌은 단 1점 나왔으며, 석재로 볼 수 있는 자갈돌도 3점 확인되었다. 손질된 도구 종류로는 주먹도끼(1점), 대형밀개(2점), 밀개(6점), 뚜르개(4점), 긁개(2점), 부리날석기(3점), (잔)손질있는조각(4점), 사용흔있는조각(1점) 등이 나왔다. 그 외에 망치돌도 3점 확인되었다. 석기제작에 이용된 암석은 석영맥암과 규암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도면 37). 석영맥암은 83점으로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그다음으로 규암은 31점 나와 25%를 차지한다. 그 외에는 편암, 편마암, 사암 등은 각각 8점, 2점, 1점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전체를 대분류하면 크게 석기제작과정의 산물류 96점, 도구 류 23점, 석기제작용 공구류 3점, 원석류 3점 등으로 구분된다. 바꿔 말하면 석기제작의 재료가 되는 석재(원석류), 석기제작용 공구류 및 제작과정에서 나온 산물류를 포함하여 석기제작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유물이 모두 102점으로 전체의 82% 정도이다. 다만, 부스러기를 비롯한 격지와 조각의 비율이 높은 데 반해 몸돌은 1점만 출토되었고, 게다가 규암제 몸돌에 접합되는 격지나 조각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전체 유적의 범위 중 극히 일부분에만 제한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의 유물분포도에서 확인되듯이 이번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점의 보다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문화층이 이어지면서 확장되는 점, 이번 조사지점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구석기시대 유적 발굴조사 사례가 있는 점등으로 뒷받침된다. 이러한 요소를 종합해 볼 때 유적은 현재 드러난 문화층 범위보다 더 큰 규모의 석기제작터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전체 유적의 극히 일부분만 발굴된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석기 사용의 행위를 유추할 수 있는 도구류는 23점으로 18%를 차지한다. 현재 발굴조사된 범위로 볼 때 소규모유적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소규모유적에서의 도구류 출토 비율이 대체로 10% 내외임을 생각할 때 높은 편이다. 나아가 23점의 도구 중 밀개와 뚜르개, 부리날석기 등 특정 용도로 연결시킬 수 있는 유물이 13점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곧 밀개, 뚜르개, 부리날석기 등을 사용하는 작업의 빈도가 높았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발굴조사된 범위는 전체 유적의 문화층 중 극히 일부분만 발굴되었음을 고려할 때, 유적의 명확한 성격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현재까지의 조사성과로 볼 때 규모가 있는 석기제작터의 일부가 드러났고, 아울러 밀개와 뚜르개, 부리날석기 등의 특정 석기를 보다 중점적으로 사용했던 지점이 발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곧 석기 제작의 모습과 석기 사용의 모습을 모두 엿볼 수 있는 생활터로써의 성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 문화층의 시기
표준 단면으로 본 지층 퇴적은 크게 4개로 구분된다. 위로부터 1. 표토층(20~30㎝)-2. 갈색 찰흙층(Hue 7.5YR 4/6, 50~60㎝, 문화층)-3. 황갈색 모래질찰흙층(Hue 10YR 5/6, 50~80㎝)-4. 황갈색 모래층(Hue 10YR 5/6, 약 1m 이상, 하성퇴적) 순으로 퇴적되었다. 이 중 표토층 아래의 갈색 찰흙층이 구석기시대 문화층으로, 표본 및 발굴조사에서 모두 125점의 석기가 나왔다. 뗀석기가 출토된 지층은 갈색 찰흙층 내지 적갈색 찰흙층으로, 토양쐐기 구조의 끝부분이 부분적으로 확인되는 층의 상부이다. 이를 주변의 발굴조사된 유적과 대비해 보면, 화성 감배산유적(경기대학교박물관 2006)의 2문화층, 그리고 화성 오산리유적(中央文化財硏究院 2015)의 2 혹은 1문화층, 화성 청계리유적(中央文化財硏究院 2015)의 3 혹은 2문화층 등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층 내 상부 토양쐐기 구조의 아랫부분이 극히 부분적으로만 발달해 있는 특징으로 볼 때, 한창균의 B1층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한창균 2003). 다만 표토 및 경작층을 걷어낸 후 드러난 문화층의 토양쐐기 구조는 시작 부분이 이미 깎여나간 상태였으므로 적어도 B1층의 상부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보다 아래는 한창균의 B2층에 상당한다. 화성 감배산유적 2문화층은 30,000~35,000BP로 추정되었다. 화성 오산리유적의 경우, 1문화층에서 얻은 OSL 연대는 20±2Ka, 2문화층에서의 연대는 23±3Ka이다. 이 중 1문화층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반면 2문화층의 연대는 보다 아래에서 측정된 연대값의 차이 및 유물의 특징을 감안할 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있으며, 청계리유적의 연대측정 결과가 보다 참고할 만하다고 재고하였다. 화성 청계리유적의 OSL 연대는 2문화층에서 41±7Ka, 3문화층에서 38±9Ka이 보고되었다. 3문화층에서는 층의 최하부에서 석기가 출토되는 점을 들어 연대측정치보다 조금 이른 약 45Ka 전후로 해석하였다. 이번 조사지점에서 채취한 OSL 시료의 측정 결과는 32,380 ± 3,410 BC (1σ SE)로 절대연대편년 되었다. 따라서 문화층의 연대측정값 및 주변 유적의 연대값을 종합했을 때 30,000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에 일정 기간 머물렀던 구석기시대인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3. 도구류 비율로 본 공간의 성격
문화층에서 출토된 도구류는 23점이며, 종류는 주먹도끼(1점), 대형밀개(2점), 밀개(6점), 뚜르개(4점), 긁개(2점), 부리날석기(3점), (잔)손질있는조각(4점), 사용흔있는조각(1점) 등이다. 이들 도구류의 분포를 살펴보면 석기 종류별로 특정한 구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석기 제작과 석기 사용의 모습을 함께 그려보며 넓게 이해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도구별 크기를 비교해보면 대형밀개 2점은 약 10㎝ 이상으로 월등히 크다. 소형석기류 중 밀개, 뚜르개, 부리날석기, 긁개 등이 3~8㎝ 정도의 중소형에 수렴되는 반면, 손질 및 사용흔있는조각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크기에 분포함을 볼 수 있다.
도구류의 종류별 개수를 보면 대형밀개를 비롯한 밀개와 뚜르개, 부리날석기 등 특정의 용도로 연결시킬 수 있는 유물이 15점으로 전체 도구의 65%에 해당한다. 주변의 화성 오산리·청계리유적(中央文化財硏究院 2015)에서 이루어진 석기 쓴자국 분석을 참고할 때, 오산리유적의 밀개에서는 단단한 동물 재료에 사용되면서 형성된 흔적이 많고, 청계리유적에서는 부드러운 동물 재료에 사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분석 사례(김포 풍곡리유적, 호평 지새울Ⅱ유적, 남양주 호평동유적 등)를 참고할 때, 일반으로 밀개에서는 가죽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흔적들이 다수를 차지한다(提隆 2011, 김경진 2018). 이 일반적인 분석 결과를 적용할 때, 대형밀개와 밀개는 가죽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문화층에서 대형밀개와 밀개가 8점이나 출토되어 가죽 처리와 관련된 작업의 비 중이 높았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뚜르개와 부리날석기가 7점이나 출토된 점도 이와 연관시킬 수 있다.
특히 밀개의 경우, 날의 곡률에 따라 3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먼저 대형밀개의 날은 각각 3.3R과 4.3R로 둥근 정도가 가장 크다. 다음 표본조사에서 찾은 3점의 밀개와 발굴조사에서 나온 1점의 밀개는 2.1~2.4R로 중형 날로 볼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찾은 나머지 2점 밀개의 곡률은 각각 1.3R과 1.8R이고, 망치로 사용되기 전 밀개로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것의 곡률은 1.8R이다. 이 3점의 밀개 날은 소형 날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날의 곡률을 중심으로 비교했을 때 대-중-소형의 3개 그룹의 날이 갖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밀개를 사용한 가죽 처리 및 가공과 관련한 일련의 작업이 이루어졌으리라 추정된다.
4. 격지의 속성으로 본 도구 제작 기법
문화층에서는 1점의 규암제 몸돌이 출토되었다. 이 몸돌에는 아랫면과 앞면 등 2개의 격지면이 남아있으며, 각 격지면에 남아있는 격지 뗀 자국의 길이는 각각 4.9~8.9㎝와 5.0~7.6㎝이다. 종합하면 약 5~9㎝의 격지 떨어진 자국이 몸돌에 남아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몸돌에서 5~9㎝ 크기의 격지를 뗐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격지는 모두 19점이 나왔으며, 표본조사에서 1점, 발굴조사에서 18점이 출토되었다. 암석은 석영맥암과 규암이 각각 9점과 10점 확인되었다. 격지의 크기를 살펴보면 길이 2.2~4.5㎝, 너비 1.5~5.3㎝, 두께 0.8~1.9㎝에 분포하여 대체로 작은 편이다. 몸돌에는 5~9㎝의 격지가 떨어진 데 반해, 출토된 격지의 크기는 그 절반 정도의 크기인 셈이다. 격지 위끝의 형태는 떼기가 이루어진 것이 7점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곧은 것이 6점이다. 꺾인 것과 깨지거나 부러진 것이 각각 2점이며, 배면쪽으로 휜 것도 2점 있다. 특히 위끝에 떼기가 이루어진 것이 많아 특징적이며, 이런 경우 격지 위끝부에서 재차 격지를 뗀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격지 굽 상태를 보면 점굽(4점)과 선굽(2점)이 6점으로 비율이 높은 편이다. 점굽 및 선굽의 격지는 물론 몸돌에서 떼낸 예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격지 혹은 조각에서 재차 격지를 뗐을 때 나타나는 사례도 있다. 이처럼 점굽과 선굽의 빈도가 높은 점을 격지가 유난히 작다는 크기 분석의 결과와 연결시켜 볼 때 후자의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격지 등면 상태를 관찰했더니 격지의 배면인 예도 있어, 격지에서 재차 격지를 뗐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몸돌에 남아있는 격지 뗀 자국에 비해 실제 출토된 격지의 길이가 훨씬 작은 점, 격지의 굽이 점굽 혹은 선굽의 빈도가 높은 점, 격지 위끝 형태에 떼기가 이루어진 것이 7점이나 확인되는 점 등을 종합하면, 석기제작터에서 원래의 격지를 몸체로 하여 한 번 더 뗐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격지에서 다시 더 작은 격지를 떼는 경우가 빈번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도구류 중에는 격지의 위끝 부분에서 재차 격지를 떼어 날을 제작한 뚜르개(41번)가 1점 확인되었다. 또한 격지의 위끝 부분에서 다시 격지를 뗀 7점 중에는 뚜르개를 제작하던 과정으로 추정되는 것(101번)도 1점 확인되었다. 2016년에 발굴되었던 주변 유적 출토의 긁개에서도 이와 같은 특성이 확인되었고, 이를 ‘2차 가공석기’로 표현하였다(서해문화재연구원 2016).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격지의 위끝 부분에서 재차 격지를 뗀 나머지 6점도 뚜르개 혹은 어떤 특정 석기를 제작하는 과정 중에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양상을 종합하면, 격지의 위끝 가장자리에서 재차 작은 격지를 떼어 도구로 손질하는 기법은 이 유적에서 소형의 도구를 제작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체 유적의 문화층 중 극히 일부분만 발굴된 점, 동일한 기법으로 제작된 도구의 출토 및 확인율이 아직 낮은 점 등에서 특정 기법으로 복원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된다. 추후 발굴조사의 기회를 얻어 더 많은 관련 자료가 확보되어 도구 제작의 특정 기법으로 복원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